[교육철학] 플라톤의 교육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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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그의 생애...*그의 사상*그의 교육사상
본문
우리는 인류의 영원한 스승으로 추앙받는 사람들 중 4대 현인을 알고있다. 예수님, 공자, 석가, 그리고 소크라테스. 오늘 내가 말하고자 하는 플라톤은 4대 현인은 아니지만, 그들 중 하나로 잘 알려진 소크라테스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어찌보면 플라톤으로 인해 소크라테스가 지금처럼 잘 알려졌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럼 지금부터 플라톤에 대해 차근차근 알아보도록 하자.조사하던 과정에서 우리가 부르고 있는 플라톤이라는 그의 명칭은 ‘가슴이 넓다’라는 뜻으로, 그의 조부가 불러오던 별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의 실제 이름은 아리스토클레스(Aristocles)이다. 하지만 이 레포트에서는 모두 플라톤으로 명시했음을 알린다. *그의 생애...때는 아테네 최고의 전성기 시절(BC 428년경). 코드로스(Kodros)왕조의 혈통인 아버지-아리스톤(Ariston)과 솔론의 후예인 어머니-페리크티오네 사이에 태어난 플라톤은 전통있고 저명한 아테네 명문 출신으로 인정받았다. 이러한 귀족적 혈통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그가 통치자의 길을 걸어가도록 결정해 놓고 있었다. 그가 20살 되던 해에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소크라테스를 만나 8년간 그의 뒤를 따르게 된다.-소크라테스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학생과 스승사이로//고는 생각되어지지 않으므로 그를 따라다니며 배웠다고 이야기 하겠음.그러던 중 그의 조국 아테네는 정치적 소용돌이에 점차 빠져들기 시작했고, 급기야 그가 스승처럼 따랐던 소크라테스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된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민주주의에 대한 플라톤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안으로는 소크라테스의 사형, 소피스트들에 의한 개인주의의 만연, 30인의 독재 등으로 곪아 터지고 밖으로는 스파르타에게 패한 이후에 약해질 대로 약해진 아테네에 회의를 느낀 플라톤은 급기야 방랑의 길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플라톤은 몇 년동안 그리스, 이탈리아, 이집트 등을 여행하면서 약해진 아테네를 다시 그리스 최강의 국가로 일으켜 세우려는 확고한 목적을 갖게 되고, 그의 정치이론은 틀을 잡아간다. 특히 시칠리아 섬의 참주 디오니시오스 1세를 만나고 청년 디온(Dion)과 교제하 면서 그는 “철학자들이 왕이 되거나, 왕이 철학자가 되지 않는 한, 이 세계에는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다” 라는 이른바 철인정치의 틀을 보여준다. 40세(BC 387)가 되던 해 그는 아테네로 돌아와 아카데미아(Academia)를 열고 철학적 문제를 강의하며, 통론을 장려하였으며 집필 활동에 몰두하였다. 여기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강조한 덕(德, arete)과 피타고라스가 강조한 생명을 주시하였으며, 교수와 학습의 공동체이자 생활 공동체의 모습을 갖추었다.그가 60세 (BC 367)되던 때, 젊은시절 만났던 친구 디온의 초청을 받아 디오니시오스 2세를 교육하기 위하여 다시 시칠리아로 갔다. 플라톤은 자신의
참고문헌
위대한 교육 사상가들 연세대 교육철학연구회. 교육과학사(1999)교육의 역사와 사상 노상우. 교육과학사(1999,2004)열린 교육학 서양교육사편 김진희,이기문 지구문화사(1999)서양교육사 김경희,정희숙 집문당(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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